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사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집단양민학살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당시 참전장교의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해병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65․예비역 대령)씨는 4월18일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 및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66년 11월14일 베트남 중부지역 쿠앙응아이 선틴현 지역에서 베트콩 탐색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중 20~35살 정도의 비무장 청년 29명을 후송 과정에서 폭탄구덩이에 넣고 모두 사살하는 등 집단학살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이 사건은 66년 11월9일부터 14일까지 선틴현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베트콩 소탕작전(일명 용안작전) 과정에서 일어났다며 같은 달 10일 민간인 촌락에 진입하던 중 경미한 사격이 날아오자 그곳에 거주하던 부녀자와 노인들 수십명을 사살하고 가옥을 모두 불태운 사건도 있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비무장 베트남인 29명 집단사살과 관련해 산굴 수색 과정에서 이들을 체포했으나 무기를 발견하지 못해 애초 남베트남군 포로심문소에 넘길 계획이었다며 그러나 대대로부터 월맹군 매복조에게 당한 인접 6중대를 구출하라는 긴급지시가 떨어져 더 이상 데려가지 않고 모두 사살했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그동안 베트남 현지 피해자와 가족들의 증언이 잇따랐으나, 한국군 참전군인의 증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또 한 마을에서 40~50명 정도의 주민을 모아놓았다가 모두 집단사살한 사건도 있었다며 당시 나는 중대원들에게 살려주라고 명령했으나 뒤에 남아 있던 부대원들이 이 지시를 듣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런 살상내용을 상부에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한겨레21>은 김씨의 증언에 따라 베트남 현지취재를 한 결과, 당시 양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푹빈촌 일대이며, 이곳 주민들의 증언과 김씨의 고백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김씨는 해사 14기 출신으로 66년 10월부터 67년 11월까지 1년간 베트남전에 참가했으며, 그 뒤 해병 제1사단 파월특수교육대 교관, 김포보안부대장, 해군첩보부대장, 국방부 대간첩본부 정보과장 등을 지내고 지난 82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전종휘 기자symbio@hani.co.kr
피해 베트남주민들의 증언
음력 9월27일이야. 아침 7시께 한국군이 럼럭촌쪽에서 들어왔어. 집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쏘아죽였어. 도망가다 총에 맞아죽고….(레 티 티엣․65)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쳐 그 때 24살이던 시동생 부인을 끌고 갔어. 살결도 하얗고, 마을에서 제일 예뻤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마가 찢어져 바늘로 꿰매져 있었어. 까만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도 갈가리 찢기고….(하 티 호이․76)
김기태씨가 무수한 주검을 봤다는 안뚜엣마을. 마을 중간쯤 공터엔 이런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우뚝 서 있다. `푹빈 양민학살 유적. 1966년 10월9일 남조선 군인들이 양민 68명을 학살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같은날 `따이한 제사'를 지낸다.
티엣은 그날 아이 2명을 안은 채 한국군에게 끌려 갔으나 아기를 보여주면서 살려달라고 정신없이 빈 탓에 살아났다고 했다.
그러나 호이의 동서는 일부 주민들과 함께 마을 한켠으로 끌려갔다가 주민 여러분! 날 좀 구해줘요!라는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한국군에게 강간당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증언했다. 이어 한국군은 모여있던 주민 가운데 마을 남자 2명도 끌고 갔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귀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건 현장에 여전히 살고 있는 응웬 리(75) 할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밥그릇을 들고, 입 안에 밥이 든 채 돌아가셨어. 조카들이 엎드려 있어서 기어다니는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죽어 있었어. 고통스러워 방바닥을 파다 죽은 거야. 그가 집 뒤의 땅굴에 갔을 때 어머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무서워서 그러는가보다 생각하고 손을 내리자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외조카는 한달된 젖먹이를 앉고 죽어 있었다. 젖을 먹이려 했는지 한쪽 가슴을 열어젖힌 채…. 마을 사람들은 이날 한국군에 죽인 사람이 1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학살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 팜 티 퐁(54․여)은 한국군이 우리 가족을 모두 체포해 당시 푹빈촌 학교운동장 자리로 끌고 갔어. 도착해보니 (푹빈촌의) 빈쭝마을에서 끌고온 여성과 노인, 아이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지. 얼마 있다가 (한국군이) 갑자기 다연발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어. 우리는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고…. 나도 피투성이가 됐지만 죽은 사람들 밑에 깔려 있었어. 그래서 한국군이 그냥 지나갔어.
[베트남 푸앙응아이/황상철 한겨레21 기자 ]
김기태씨, '정부 차원 보상 필요'
김기태(65)씨는 18일 <한겨레> 취재진과 만나 용안작전 이틀째 있었던 푹빈촌 사건의 피해자들 대부분이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라 죄책감이 든다며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비무장 베트남 청년들을 폭탄구덩이에 넣고 집단 사살한 것은 당시 작전상황에서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무기도 없는 베트남 청년들을 꼭 폭탄구덩이에 넣고 죽여야 했나.
=모두 남자들인데다 무기는 감춰놓았을 수도 있어 충분히 전투병력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끌고 올 때 산 위에서 베트콩들이 저격을 하기도 했다.
-작전양상이 너무 심한 것 아니었나.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이다. 적 통치 지역에서는 베트콩이든 베트콩이 아니든 식별이 안된다. 모든 베트남작전의 양상이 다 그랬다. 베트콩 마을을 그냥 통과하면 베트콩한테 연락해서 우리의 뒤통수를 갈겼다.
-베트콩 용의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나.
=젊은 사람들은 일단 베트콩이라고 생각해 끌고 다니다가 다행히 작전이 일찍 끝나면 포로로 후송했다. 그러나 작전이 일찍 끝나지 않고 아군이 피해를 받으면 사살했다.
-아이들과 여성, 노인들을 죽인 까닭은.
=젊은 사람들은 도망가 숨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들은 안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을에 남아있던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노약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많이 봤다.
-한국군이 귀를 자르고 코를 잘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 있었다. 중대원 가운데 한명은 죽은 사람의 눈알만 파서 알코올병에 담가두는 병사가 있었다. 또 한명은 한쪽 귀만 잘라 모아 철사로 꿰어 막사 앞에 걸어놓기도 했다. 귀국할 때 기념으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심정이 어떤지.
=나는 살인 교사자이자 살인 집행관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비록 부하들이 죽였지만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종휘 기자symbio@hani.co.kr ]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의 '고백'
66년 11월9일부터 같은달 27일까지 한국군 청룡여단 1,2,3대대는 번갈아가며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에서 `용안작전'이란 베트콩 탐색 소탕작전을 벌였다. 당시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중대장 김기태 대위)는 용안 제1단계 작전(11월9~14일)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세 차례의 민간인 집단학살이 있었다.
66년 11월14일 오후 2시께 베트남의 중부지역인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의 서부지역 야산 아래 논바닥에서 소대장은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중대장에게 물었다. 눈앞에는 20~35살 가량의 청년 29명이 탄약줄에 두손을 묶여 굴비처럼 엮여 있었다.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대대 상황실에서 남쪽 2~3㎞ 지점에서 6중대가 월맹군 매복조에게 당했으니 빨리 가 구출하라는 긴급무전 지시가 떨어졌다. 중대장은 짤막하게 지시했다. 처치 곤란, 저리 끌고 가.
베트남 젊은이들은 차례로 폭탄구덩이에 던져졌고 자동화기와 수류탄 세례가 가해졌다. 그리곤 대원들의 확인사살이 이어졌다.
이에 앞서 11월10일 7중대는 공격목표 14 안투엣1 마을에 도착했다. 집이 30~40채 정도인 이 마을에서는 경미한 저항이 있었으나, 공격받아 부상당하거나 숨진 부하는 없었다.
그러나 앞서가는 2․3소대의 뒤를 이어 중대본부가 불타는 마을에 들어서자 길바닥엔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가 깨지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주검이 무더기로 있는 곳도 보였다.
중대장은 무전으로 앞서가는 소대장들에게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들아 그만 좀 죽여! 이 마을에서 대략 몇명이 죽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주검을 밟고 가야 할 정도로 많은 주검이 널부러져 있었다.
이날 오후 7중대는 서쪽에 있는 마을 하나를 더 공격했다. 앞서가던 2소대와 3소대원들이 이번에는 주민들을 모아 앉혀놓았다. 40~50명쯤 됐을까. 대부분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이었다. 야, 그냥 보내! 중대장은 중대본부를 뒤따라오던 화기소대에 주민들을 살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소대들을 지휘하며 전진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뒤에서 총성이 요란했다. 야, 뭐야! 중대장이 고개를 돌리며 고함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사병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총성은 계속됐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냥 갈 수 없었다. 누군가 살아 남아서 증언하게 되면 골치아프니까. 중대장으로선 전쟁터에서 민간인학살이 벌어지면 알려지지 않도록 확실히 (확인사살을) 하라고 지시할 수 밖에 없었다. 김씨의 말이다.
[ 정리=황상철 <한겨레21> 기자rosebud@hani.co.kr ]
베트남 민간인학살 외신들 상세 보도
AFP통신과 AP통신 등 외신들은 18일 베트남전의 한국국 양민학살과 관련해 <한겨레 21>과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김기태(65․예비역 대령)씨의 증언 내용을 상세히 인용한 기사를 전세계에 타전했다.
AFP통신은 19일 <한겨레 21>과 <한겨레>를 인용해 한국의 한 퇴역 장교가 수십년간의 침묵을 깨고 자신의 부대가 1966년 베트남 전쟁 당시 노인과 부녀자 등 100여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면서 그간 많은 베트남의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한국군의 잔학행위를 고발했으나, 학살행위가 참전한 퇴역군인을 통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AP통신은 18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김씨가 <한겨레 21>과의 회견을 통해 전쟁 당시 자신이 관여했던 베트남 민간인 집단학살 사실을 털어놨다며, 김씨의 구체적인 증언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기사는 또 그동안 몇몇 취재진들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보도했으나, 김씨처럼 실명으로 관련 사실을 증언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하성봉 기자 sbha@hani.co.kr]
정부, 베트남전 사후처리 무대책
베트남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사후처리 대책이 전혀 없어 현지 교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진출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지금은 베트남과 긴밀한 우호관계를 맺으며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7천여 교민들은 최근 계속되고 있는 외국언론에 의한 한국군의 베트남 주민 학살보도가 기업활동이나 교민들의 신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현지 공관들은 교민들의 이같은 불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베트남 당국도 이같은 보도를 원하지 않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 정부에 대한 교민들의 불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92년 수교 후 베트남에 큰 관심을 갖고 투자하기 시작한 한국은 그동안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잇따라 다녀갔고 500여 기업들이 해마다 많은 자금을 투자해 지금은 베트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나라들 중의 하나로 착실한 우호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해부터 한국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참전 한국군의 베트남 주민학살 보도는 베트남 종전 25주년을 앞두고 로이터, AP 등 외신사와 뉴스위크, 워싱턴타임스 등 세계적인 언론에 잇따라 보도돼 그동안 쌓아온 베트남인들의 한국에 대한호감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지경이다.
또 최근에는 호치민시에서 발간되는 토이체(청년), 전국지인 라오동(노동) 등 현지신문들이 한국군의 한 학살 기사를 크게 보도하기 시작, 한국인들을 보는 베트남인들의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개방적인 성격이 강한 호치민시는 한국군 학살과 관련된 단체가 결성되고 비정부기구와의 연대투쟁 움직임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밖에 19일 한국에서 참전장교의 학살시인 발표가 나오고 오는 5월1일에는 학살지로 추정되고 있는 쾅남지방에서 일부 한국참전용사 모임에 의한 희생주민 추모비의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교민들은 지난 해부터 시작된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한국정부의 확실한 입장을 여러차례 요구했으나 현지 공관은 아무런 가시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아 결국 외국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초래한 셈이 됐다고 주장한다.
특히 베트남은 최근 한국군이 집중적으로 주둔해 학살의혹이 나오고있는 중부지방에 대해 그동안의 태도를 바꿔 외신들의 취재를 허용, 사실상 이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는 '베트남이 문제 확산을 원하지 않는다'는 논리만 지속하며 대책을 미루고있다.
교민들은 이왕에 외신과 국내언론을 통해 학살 주장이 확산되고 있고 베트남 정부 역시 간접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는 양국간 공식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잘못이 있으면 응분의 조치를 하든지 아니면 베트남 정부, 교민들과 협조해 불리한 보도가 나오지 않도록 하든지 둘중에 하나가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새로 호치민시 한인회장에 취임한 박상수씨는 "그동안 쌓아온 한국의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앞으로 교민 기업들이 베트남 직원들과 일을 하는데 많은 애로가 예상되며 문제가 확산될 경우 교민들의 안전도 우려된다"고 말하고 "정부가 하루빨리 확실한 태도를 보여줘야 우리 교민들이 안심하고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쾌현특파원,호치민시/연합뉴스)
해병전우회, 베트남양민학살보도 관련 성명
`해병대 월남전 참전 전우회'는 21일 <한겨레21>과 <한겨레>의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와 관련한 성명을 통해 주월사령부의 명령과 인명존중의 기본원칙에 따라 전투임무를 수행한 참전 군인들을 죄인 취급하는 보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참전 전우회는 당시 베트콩은 양민 복장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해 이들과 양민을 완벽하게 식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특수한 상황이었다며 그럼에도 청룡부대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참전 전우회는 `양민학살'이란 검증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해 참전 군인들의 명예를 계속 훼손할 경우 모든 수단을 다해 대응하겠다고 덧붙였다. 김현수 기자hskim@hani.co.kr
편집시각 2000년04월21일18시37분 KST 한겨레/국제
'한국과 관계악화 없을 것'
【하노이=AFP 연합특약】 베트남 정부는 21일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잔학행위로 희생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한국 시민단체들의 노력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과거로 인해 한국과의 관계에 나쁜 영향이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판 투이 탱 베트남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한국 등 여러 나라가 베트남에서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베푼 활동과 물질적인 지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며 전쟁이 남긴 결과들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하고 효과적인 협력이야말로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정부는 한국언론이 보도한 전쟁기간 한국군에 의한 잔학행위의 폭로로 인해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어떠한 뜻도 없다며 베트남 국민들은 우정과 인도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가 남긴 문제에 관한 한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넘기고 미래를 향해 상호 발전을 위한 협력을 원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외무부 성명은 지난 19일 <한겨레21>과 <한겨레>가 예비역 대령 김기태씨 말을 인용해 김씨의 부대가 66년 베트남 중부지역 쿠앙응아이 선틴현 지역에서 10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폭로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첫번째 반응이다.
참여연대 등 12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는 20일 한국 정부에 공식사과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베트남전 고엽제 자녀들에게 더 심한 피해
베트남전에서 미군등에 의해 뿌려진 고엽제의 피해는 당사자들 보다 자녀들에게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베트남 정부가 고엽제가 많이 뿌려진 지역중의 하나인 중부 닥락지역을 대상으로 고엽제 피해상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피해자는 6천312명이었는데 이중 2천778명이 전쟁 당시 직접 피해를 당한 반면 3천409명은 부모로부터 피해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 또는 환자가 된것으로 나타났다.
사망자 집계도 당사자 중 사망자는 111명으로 감염자의 4%에 불과한 반면 자녀 중 사망자는 920명으로 전체의 27%나 됐다.
한편 전체 피해자 중 주부가 절반에 가까운 2천719명이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베트남인 사살 '한국정부 69년 직접조사'
베트남전 당시 중앙정보부가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사살 사건을 직접 수사했던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해병 청룡여단 제1대대 1중대 소속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김석현(65․브라질 거주), 최영언(58․전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이상우(57․부산 동아대 체육대학장), 김기동(59․사업)씨는 25일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1중대가 베트남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한 일로 지난 69년 11월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3~4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정부가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사살과 관련한 진상을 조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그동안 정부는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사살에 대한 관련 자료가 없다고 밝혔었다.
당시 중정이 조사한 사안은 청룡여단이 1968년 1월30일부터 2월29일 사이에 베트남 중부 쿠앙남성 일대에서 벌인 괴룡1호작전이라는 베트콩 수색소탕작전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한국군에 의해 집단사살된 사건이다.
최씨 등에 따르면 당시 1중대가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촌 옆을 지나던 중 마을 쪽에서 사격이 날아와 부대원 1명이 쓰러지자 마을을 공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을 모아 1번 국도쪽으로 보냈으나 뒤에 모두 사살됐다는 것이다. 최씨는 1․2소대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뒤로 보냈으나 후미 소대의 어느 분대원들이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이 마을은 남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안전 마을이었으며, 미국 해병대 소대와 자매결연까지 맺고 있었다.
이상우씨(당시 2소대장)는 사건 다음날 아침 마을 주민들이 40~50구의 주검을 가마니 등으로 덮은 채 1번국도에 죽 늘어놓고 통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사건으로 중대장이 조기귀국했고 나도 베트남에서 청룡여단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가 사건 발생 1년9개월만에 뒤늦게 조사를 벌인 것은 남베트남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이 사건이 두나라 사이의 외교문제로 비화한데다 당시 미국 언론에서 이 사건을 보도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손원제 기자wonje@hani.co.kr ]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집단양민학살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당시 참전장교의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해병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김기태(65․예비역 대령)씨는 4월18일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 및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66년 11월14일 베트남 중부지역 쿠앙응아이 선틴현 지역에서 베트콩 탐색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중 20~35살 정도의 비무장 청년 29명을 후송 과정에서 폭탄구덩이에 넣고 모두 사살하는 등 집단학살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이 사건은 66년 11월9일부터 14일까지 선틴현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베트콩 소탕작전(일명 용안작전) 과정에서 일어났다며 같은 달 10일 민간인 촌락에 진입하던 중 경미한 사격이 날아오자 그곳에 거주하던 부녀자와 노인들 수십명을 사살하고 가옥을 모두 불태운 사건도 있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비무장 베트남인 29명 집단사살과 관련해 산굴 수색 과정에서 이들을 체포했으나 무기를 발견하지 못해 애초 남베트남군 포로심문소에 넘길 계획이었다며 그러나 대대로부터 월맹군 매복조에게 당한 인접 6중대를 구출하라는 긴급지시가 떨어져 더 이상 데려가지 않고 모두 사살했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그동안 베트남 현지 피해자와 가족들의 증언이 잇따랐으나, 한국군 참전군인의 증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또 한 마을에서 40~50명 정도의 주민을 모아놓았다가 모두 집단사살한 사건도 있었다며 당시 나는 중대원들에게 살려주라고 명령했으나 뒤에 남아 있던 부대원들이 이 지시를 듣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런 살상내용을 상부에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한겨레21>은 김씨의 증언에 따라 베트남 현지취재를 한 결과, 당시 양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푹빈촌 일대이며, 이곳 주민들의 증언과 김씨의 고백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김씨는 해사 14기 출신으로 66년 10월부터 67년 11월까지 1년간 베트남전에 참가했으며, 그 뒤 해병 제1사단 파월특수교육대 교관, 김포보안부대장, 해군첩보부대장, 국방부 대간첩본부 정보과장 등을 지내고 지난 82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전종휘 기자symbio@hani.co.kr
피해 베트남주민들의 증언
음력 9월27일이야. 아침 7시께 한국군이 럼럭촌쪽에서 들어왔어. 집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쏘아죽였어. 도망가다 총에 맞아죽고….(레 티 티엣․65)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쳐 그 때 24살이던 시동생 부인을 끌고 갔어. 살결도 하얗고, 마을에서 제일 예뻤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마가 찢어져 바늘로 꿰매져 있었어. 까만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도 갈가리 찢기고….(하 티 호이․76)
김기태씨가 무수한 주검을 봤다는 안뚜엣마을. 마을 중간쯤 공터엔 이런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우뚝 서 있다. `푹빈 양민학살 유적. 1966년 10월9일 남조선 군인들이 양민 68명을 학살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같은날 `따이한 제사'를 지낸다.
티엣은 그날 아이 2명을 안은 채 한국군에게 끌려 갔으나 아기를 보여주면서 살려달라고 정신없이 빈 탓에 살아났다고 했다.
그러나 호이의 동서는 일부 주민들과 함께 마을 한켠으로 끌려갔다가 주민 여러분! 날 좀 구해줘요!라는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의 한국군에게 강간당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증언했다. 이어 한국군은 모여있던 주민 가운데 마을 남자 2명도 끌고 갔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귀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건 현장에 여전히 살고 있는 응웬 리(75) 할아버지는 가족을 잃은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밥그릇을 들고, 입 안에 밥이 든 채 돌아가셨어. 조카들이 엎드려 있어서 기어다니는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죽어 있었어. 고통스러워 방바닥을 파다 죽은 거야. 그가 집 뒤의 땅굴에 갔을 때 어머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무서워서 그러는가보다 생각하고 손을 내리자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외조카는 한달된 젖먹이를 앉고 죽어 있었다. 젖을 먹이려 했는지 한쪽 가슴을 열어젖힌 채…. 마을 사람들은 이날 한국군에 죽인 사람이 1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학살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 팜 티 퐁(54․여)은 한국군이 우리 가족을 모두 체포해 당시 푹빈촌 학교운동장 자리로 끌고 갔어. 도착해보니 (푹빈촌의) 빈쭝마을에서 끌고온 여성과 노인, 아이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지. 얼마 있다가 (한국군이) 갑자기 다연발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어. 우리는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고…. 나도 피투성이가 됐지만 죽은 사람들 밑에 깔려 있었어. 그래서 한국군이 그냥 지나갔어.
[베트남 푸앙응아이/황상철 한겨레21 기자 ]
김기태씨, '정부 차원 보상 필요'
김기태(65)씨는 18일 <한겨레> 취재진과 만나 용안작전 이틀째 있었던 푹빈촌 사건의 피해자들 대부분이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라 죄책감이 든다며 전쟁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비무장 베트남 청년들을 폭탄구덩이에 넣고 집단 사살한 것은 당시 작전상황에서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무기도 없는 베트남 청년들을 꼭 폭탄구덩이에 넣고 죽여야 했나.
=모두 남자들인데다 무기는 감춰놓았을 수도 있어 충분히 전투병력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끌고 올 때 산 위에서 베트콩들이 저격을 하기도 했다.
-작전양상이 너무 심한 것 아니었나.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이다. 적 통치 지역에서는 베트콩이든 베트콩이 아니든 식별이 안된다. 모든 베트남작전의 양상이 다 그랬다. 베트콩 마을을 그냥 통과하면 베트콩한테 연락해서 우리의 뒤통수를 갈겼다.
-베트콩 용의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했나.
=젊은 사람들은 일단 베트콩이라고 생각해 끌고 다니다가 다행히 작전이 일찍 끝나면 포로로 후송했다. 그러나 작전이 일찍 끝나지 않고 아군이 피해를 받으면 사살했다.
-아이들과 여성, 노인들을 죽인 까닭은.
=젊은 사람들은 도망가 숨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들은 안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을에 남아있던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노약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많이 봤다.
-한국군이 귀를 자르고 코를 잘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 있었다. 중대원 가운데 한명은 죽은 사람의 눈알만 파서 알코올병에 담가두는 병사가 있었다. 또 한명은 한쪽 귀만 잘라 모아 철사로 꿰어 막사 앞에 걸어놓기도 했다. 귀국할 때 기념으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심정이 어떤지.
=나는 살인 교사자이자 살인 집행관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비록 부하들이 죽였지만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종휘 기자symbio@hani.co.kr ]
베트남전 참전 중대장의 '고백'
66년 11월9일부터 같은달 27일까지 한국군 청룡여단 1,2,3대대는 번갈아가며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에서 `용안작전'이란 베트콩 탐색 소탕작전을 벌였다. 당시 청룡여단 제2대대 7중대(중대장 김기태 대위)는 용안 제1단계 작전(11월9~14일)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세 차례의 민간인 집단학살이 있었다.
66년 11월14일 오후 2시께 베트남의 중부지역인 쿠앙응아이성 선틴현의 서부지역 야산 아래 논바닥에서 소대장은 이놈들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중대장에게 물었다. 눈앞에는 20~35살 가량의 청년 29명이 탄약줄에 두손을 묶여 굴비처럼 엮여 있었다.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대대 상황실에서 남쪽 2~3㎞ 지점에서 6중대가 월맹군 매복조에게 당했으니 빨리 가 구출하라는 긴급무전 지시가 떨어졌다. 중대장은 짤막하게 지시했다. 처치 곤란, 저리 끌고 가.
베트남 젊은이들은 차례로 폭탄구덩이에 던져졌고 자동화기와 수류탄 세례가 가해졌다. 그리곤 대원들의 확인사살이 이어졌다.
이에 앞서 11월10일 7중대는 공격목표 14 안투엣1 마을에 도착했다. 집이 30~40채 정도인 이 마을에서는 경미한 저항이 있었으나, 공격받아 부상당하거나 숨진 부하는 없었다.
그러나 앞서가는 2․3소대의 뒤를 이어 중대본부가 불타는 마을에 들어서자 길바닥엔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가 깨지고, 팔이 떨어져 나가고…. 주검이 무더기로 있는 곳도 보였다.
중대장은 무전으로 앞서가는 소대장들에게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들아 그만 좀 죽여! 이 마을에서 대략 몇명이 죽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주검을 밟고 가야 할 정도로 많은 주검이 널부러져 있었다.
이날 오후 7중대는 서쪽에 있는 마을 하나를 더 공격했다. 앞서가던 2소대와 3소대원들이 이번에는 주민들을 모아 앉혀놓았다. 40~50명쯤 됐을까. 대부분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이었다. 야, 그냥 보내! 중대장은 중대본부를 뒤따라오던 화기소대에 주민들을 살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소대들을 지휘하며 전진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뒤에서 총성이 요란했다. 야, 뭐야! 중대장이 고개를 돌리며 고함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사병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총성은 계속됐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냥 갈 수 없었다. 누군가 살아 남아서 증언하게 되면 골치아프니까. 중대장으로선 전쟁터에서 민간인학살이 벌어지면 알려지지 않도록 확실히 (확인사살을) 하라고 지시할 수 밖에 없었다. 김씨의 말이다.
[ 정리=황상철 <한겨레21> 기자rosebud@hani.co.kr ]
베트남 민간인학살 외신들 상세 보도
AFP통신과 AP통신 등 외신들은 18일 베트남전의 한국국 양민학살과 관련해 <한겨레 21>과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김기태(65․예비역 대령)씨의 증언 내용을 상세히 인용한 기사를 전세계에 타전했다.
AFP통신은 19일 <한겨레 21>과 <한겨레>를 인용해 한국의 한 퇴역 장교가 수십년간의 침묵을 깨고 자신의 부대가 1966년 베트남 전쟁 당시 노인과 부녀자 등 100여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면서 그간 많은 베트남의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한국군의 잔학행위를 고발했으나, 학살행위가 참전한 퇴역군인을 통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AP통신은 18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김씨가 <한겨레 21>과의 회견을 통해 전쟁 당시 자신이 관여했던 베트남 민간인 집단학살 사실을 털어놨다며, 김씨의 구체적인 증언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기사는 또 그동안 몇몇 취재진들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보도했으나, 김씨처럼 실명으로 관련 사실을 증언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하성봉 기자 sbha@hani.co.kr]
정부, 베트남전 사후처리 무대책
베트남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사후처리 대책이 전혀 없어 현지 교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진출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지금은 베트남과 긴밀한 우호관계를 맺으며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7천여 교민들은 최근 계속되고 있는 외국언론에 의한 한국군의 베트남 주민 학살보도가 기업활동이나 교민들의 신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현지 공관들은 교민들의 이같은 불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베트남 당국도 이같은 보도를 원하지 않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 정부에 대한 교민들의 불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92년 수교 후 베트남에 큰 관심을 갖고 투자하기 시작한 한국은 그동안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잇따라 다녀갔고 500여 기업들이 해마다 많은 자금을 투자해 지금은 베트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나라들 중의 하나로 착실한 우호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해부터 한국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한 참전 한국군의 베트남 주민학살 보도는 베트남 종전 25주년을 앞두고 로이터, AP 등 외신사와 뉴스위크, 워싱턴타임스 등 세계적인 언론에 잇따라 보도돼 그동안 쌓아온 베트남인들의 한국에 대한호감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지경이다.
또 최근에는 호치민시에서 발간되는 토이체(청년), 전국지인 라오동(노동) 등 현지신문들이 한국군의 한 학살 기사를 크게 보도하기 시작, 한국인들을 보는 베트남인들의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개방적인 성격이 강한 호치민시는 한국군 학살과 관련된 단체가 결성되고 비정부기구와의 연대투쟁 움직임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밖에 19일 한국에서 참전장교의 학살시인 발표가 나오고 오는 5월1일에는 학살지로 추정되고 있는 쾅남지방에서 일부 한국참전용사 모임에 의한 희생주민 추모비의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교민들은 지난 해부터 시작된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한국정부의 확실한 입장을 여러차례 요구했으나 현지 공관은 아무런 가시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아 결국 외국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초래한 셈이 됐다고 주장한다.
특히 베트남은 최근 한국군이 집중적으로 주둔해 학살의혹이 나오고있는 중부지방에 대해 그동안의 태도를 바꿔 외신들의 취재를 허용, 사실상 이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는 '베트남이 문제 확산을 원하지 않는다'는 논리만 지속하며 대책을 미루고있다.
교민들은 이왕에 외신과 국내언론을 통해 학살 주장이 확산되고 있고 베트남 정부 역시 간접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는 양국간 공식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잘못이 있으면 응분의 조치를 하든지 아니면 베트남 정부, 교민들과 협조해 불리한 보도가 나오지 않도록 하든지 둘중에 하나가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새로 호치민시 한인회장에 취임한 박상수씨는 "그동안 쌓아온 한국의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앞으로 교민 기업들이 베트남 직원들과 일을 하는데 많은 애로가 예상되며 문제가 확산될 경우 교민들의 안전도 우려된다"고 말하고 "정부가 하루빨리 확실한 태도를 보여줘야 우리 교민들이 안심하고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쾌현특파원,호치민시/연합뉴스)
해병전우회, 베트남양민학살보도 관련 성명
`해병대 월남전 참전 전우회'는 21일 <한겨레21>과 <한겨레>의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와 관련한 성명을 통해 주월사령부의 명령과 인명존중의 기본원칙에 따라 전투임무를 수행한 참전 군인들을 죄인 취급하는 보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참전 전우회는 당시 베트콩은 양민 복장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해 이들과 양민을 완벽하게 식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특수한 상황이었다며 그럼에도 청룡부대는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참전 전우회는 `양민학살'이란 검증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해 참전 군인들의 명예를 계속 훼손할 경우 모든 수단을 다해 대응하겠다고 덧붙였다. 김현수 기자hskim@hani.co.kr
편집시각 2000년04월21일18시37분 KST 한겨레/국제
'한국과 관계악화 없을 것'
【하노이=AFP 연합특약】 베트남 정부는 21일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잔학행위로 희생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한국 시민단체들의 노력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과거로 인해 한국과의 관계에 나쁜 영향이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판 투이 탱 베트남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한국 등 여러 나라가 베트남에서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베푼 활동과 물질적인 지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며 전쟁이 남긴 결과들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하고 효과적인 협력이야말로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 정부는 한국언론이 보도한 전쟁기간 한국군에 의한 잔학행위의 폭로로 인해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어떠한 뜻도 없다며 베트남 국민들은 우정과 인도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가 남긴 문제에 관한 한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넘기고 미래를 향해 상호 발전을 위한 협력을 원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외무부 성명은 지난 19일 <한겨레21>과 <한겨레>가 예비역 대령 김기태씨 말을 인용해 김씨의 부대가 66년 베트남 중부지역 쿠앙응아이 선틴현 지역에서 10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폭로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첫번째 반응이다.
참여연대 등 12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는 20일 한국 정부에 공식사과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베트남전 고엽제 자녀들에게 더 심한 피해
베트남전에서 미군등에 의해 뿌려진 고엽제의 피해는 당사자들 보다 자녀들에게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베트남 정부가 고엽제가 많이 뿌려진 지역중의 하나인 중부 닥락지역을 대상으로 고엽제 피해상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피해자는 6천312명이었는데 이중 2천778명이 전쟁 당시 직접 피해를 당한 반면 3천409명은 부모로부터 피해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 또는 환자가 된것으로 나타났다.
사망자 집계도 당사자 중 사망자는 111명으로 감염자의 4%에 불과한 반면 자녀 중 사망자는 920명으로 전체의 27%나 됐다.
한편 전체 피해자 중 주부가 절반에 가까운 2천719명이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베트남인 사살 '한국정부 69년 직접조사'
베트남전 당시 중앙정보부가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사살 사건을 직접 수사했던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해병 청룡여단 제1대대 1중대 소속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김석현(65․브라질 거주), 최영언(58․전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이상우(57․부산 동아대 체육대학장), 김기동(59․사업)씨는 25일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1중대가 베트남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한 일로 지난 69년 11월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3~4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정부가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사살과 관련한 진상을 조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그동안 정부는 한국군의 민간인 집단사살에 대한 관련 자료가 없다고 밝혔었다.
당시 중정이 조사한 사안은 청룡여단이 1968년 1월30일부터 2월29일 사이에 베트남 중부 쿠앙남성 일대에서 벌인 괴룡1호작전이라는 베트콩 수색소탕작전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한국군에 의해 집단사살된 사건이다.
최씨 등에 따르면 당시 1중대가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촌 옆을 지나던 중 마을 쪽에서 사격이 날아와 부대원 1명이 쓰러지자 마을을 공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을 모아 1번 국도쪽으로 보냈으나 뒤에 모두 사살됐다는 것이다. 최씨는 1․2소대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뒤로 보냈으나 후미 소대의 어느 분대원들이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이 마을은 남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안전 마을이었으며, 미국 해병대 소대와 자매결연까지 맺고 있었다.
이상우씨(당시 2소대장)는 사건 다음날 아침 마을 주민들이 40~50구의 주검을 가마니 등으로 덮은 채 1번국도에 죽 늘어놓고 통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사건으로 중대장이 조기귀국했고 나도 베트남에서 청룡여단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가 사건 발생 1년9개월만에 뒤늦게 조사를 벌인 것은 남베트남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이 사건이 두나라 사이의 외교문제로 비화한데다 당시 미국 언론에서 이 사건을 보도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손원제 기자wonje@hani.co.kr ]
출처 : 한중일 역사왜곡 청산 위원회
글쓴이 : 되니츠 원글보기
메모 :